존자암지(기념물 제43호)
작성자 시삽
작성일 1999-08-19
존자암지
지정번호 : 제주도 기념물 제43호
지정년월일 : 1995년 7월 13일
소재지 : 서귀포시 하원동 산 1-1번지(불래악 기슭)

서귀포시 하원동 해발 1280m 지점 볼래오름 기슭에 자리한 존자암지는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 (이원진, 1653년) 등 옛문헌에 그 역사가 오랜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대장경〉과 〈고려대장경〉 법주기에는 "석가모니 제자 열여섯 존자중 여섯번째 발타라존자가 탐몰라주에서 불도를 전파하였다" 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그 사실 여부는 앞날의 과제로 남는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건물지, 부도, 배수시설과 기와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앞으로 존자암지 정비사업을 통하여 제주 불교문화 유산으로 보존하게 된다.

□ 연혁

존자암이 있었던 절 터이다. 존자암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존자암은 한라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곳 동굴에 마치 승이 도를 닦는 모습과 같은 돌이 있어 세상에 修行洞(수행하는 동굴)이라 전해졌다."고 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효종 초에 간행된 이원진(1653년)의 《탐라지》 濟州牧 佛宇條(제주목 불우조)에는, 존자암의 애초의 위치는 영실이고 지금은 서쪽 기슭에서 밖으로 10리쯤 옮겼는데, 곧 대정 지경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존자암은 효종代 이전, 그 어느 시기에 그 위치가 영실에서 대정 지경으로 옮겨진 것이며, 따라서 지금의 존자암지는 17세기 중반 이전의 존자암의 터전인 셈이다. 그러면 존자암은 어느 때, 누구에 의해 건립된 암자일까. 이에 대해 상세한 내막을 전해 주는 문헌기록은 없다. 다만 충암 김정의 〈존자암기〉에 의하면, "존자암은 高 · 梁 · 夫 三姓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비로소 세워졌는데, 3읍이 정립된 후에까지 오래도록 전하여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자암의 규모와 그 위치에 대해서는 《남사록》에, "존자암의 암사는 아홉 칸인데, 지붕과 벽은 기와와 흙 대신에 판자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또, "산 중의 土脈은 粘液이 없고 또 모래와 돌이 많아서 벽을 바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기와는 반드시 육지에서 사와야 하기 때문에 재력이 그리하기에는 어렵다. 중간에 여러 번 일으켜 세웠다 폐했다 하였는데, 癸巳年(선조 26년, 1593년)에 강진에 사는 승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防護(방호)를 서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다가, 임무를 마치자 곧 재물을 내어 증수하였다."고 하였다.
또 광해군 초기에 제주 판관을 지낸 金緻의 〈유한라산기〉에 의하면, "장악을 거쳐서 三長洞에 이르고 삼장에서 포애악을 넘어 멀리 남쪽으로 한 정사에 이르렀는데, 높이 구름 속에 있어 푸른 바다를 누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존지암이다. 판자집은 8, 9칸으로 띠로 지붕을 덮었는데 사치스럽지도 추하지도 않았다. 한 늙은 스님이 문 밖에 나와 절하며 맞이하여 禪堂으로 안내하기에 그 이름을 물으니, 修淨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 곳에서 국성재를 올렸던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남사록》에 "4월에 점을 쳐서 좋은 날을 택하고 3읍의 수령 중 한 사람을 보내어 목욕 재계하고 이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를 國聖齋라 하며 지금은 폐한 지 8, 9년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성재의 연원은 미상이다.

□ 발굴조사
존자암지 부도


발굴된 존자암지는 크게 4단의 석축대지로 이루어진 공간 안에 다소 시기를 달리하는 시설물이 밀집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각 석축대지에 배치된 시설물은 그 축조수법과 중복관계, 층위분석을 통해 시기적으로 두 번에 걸쳐 존속했던 건물지와 부속시설지 군으로 나누오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판석을 주로한 건물지가 확인되며, 이들 유구에서 발견되는 유물도 인화분청과 일부의 청자편, 명문기와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조선중기에 만들어진 건물지 및 시설물은 자연석을 대충 治石한 할석을 썼으며 백자와 무문기와편이 주변에서 출토된다.
이곳 존자암지에서는 약 1,000여편 정도의 와편이 출토되었지만 막새는 단 한 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 기와는 출토지에 따라 각기 상이한 형태로 출토되기 때문에 건물지의 소속시기를 유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명문기와는 제 1차 시기 건물지에서만 확인된다. 가장 많은 출토량으로 보이는 '萬戶秉牧使' 銘瓦는 명문기와 중에서도 가장 제작기간이 빠른 것으로 이 기와와 비슷한 제작연대를 가지는 기와는 '千戶夫承碩' 명와를 들 수 있다.
특히 존자암지의 제1차 축조시기와 관련하여 연대자료로 제시할 수 있는 유물로 "□□二月修正禪師大夫金沖光 / 万戶兼牧使奉□□□□□"이라 쓰여진 명문기와가 다수 확인된다. 이 기와는 탑지 추정지에서 집중 출토된 명문와 중 하나이다. 제주도의 목사와 만호가 겸직하는 기간은 고려 충렬왕 27년(1301)부터 조선 정종 2년(1398)까지로 보고 있다. 萬戶가 하급군관으로 전락하는 성종대에 와서 결국 분리하게 된다. 이처럼 '萬戶兼牧使'라는 명와만으로도 이 기와는 고려말(1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